2023년 개봉한 영화 <유령>은 일제강점기 조선을 배경으로 한 첩보물이다. 시대극의 무게감과 스릴러 장르의 속도감을 절묘하게 섞은 이 영화는 '독립운동'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풀어냈다.
“총을 들고 싸우는 것만이 독립운동일까?” 영화는 이 질문을 던지며, 적진 한가운데에서 숨어 싸우는 이들의 용기를 조명한다. 실제 있었던 '조선의 유령 독립군'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유령>은 지금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진짜 용기란 무엇인가?”
■ 배경: 1933년, 조선 총독부 안의 ‘유령’
1933년 경성, 조선총독부는 총독 암살 사건의 배후를 쫓고 있다. 암살에 성공한 ‘유령’이 내부에 숨어들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몇 명의 의심 인물을 한 건물에 가둬놓고, 치열한 심리전을 벌인다.
이들이 서로를 의심하며 벌이는 첩보 게임은 실시간 추리극처럼 전개된다. 영화는 ‘누가 유령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관객에게 단서를 던지고 긴장을 끌어올린다.
■ 인물들: 서로 다른 얼굴의 ‘저항’
<유령>에는 각기 다른 배경과 신념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영화는 이들을 통해 저항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 박차경(이하늬 분) : 조선 출신 정보통신 담당 장교. 겉으로는 일본 제국의 하수인 같지만, 내면에는 불타는 결심이 있다.
- 유리코(박소담 분) : 일본어를 구사하는 타자수로 등장하지만, 숨겨진 정체와 감정선이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 무라야마(설경구 분) : 일본 경찰이지만 누구보다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인물.
- 천국장(서현우 분) : 기회주의자 같지만 의외의 진심을 드러내는 인물.
이 인물들은 단순한 ‘선 vs 악’의 구도로 나뉘지 않는다. 각자의 사연과 선택이 있으며, 그 안에서 진짜 ‘유령’이 누구인지가 모호해진다. 영화는 이 모호함 속에서 진짜 용기가 무엇인지 되묻는다.
■ 첩보극의 긴장감 + 시대극의 무게
<유령>은 첩보 영화 특유의 긴장감과 속도감이 강점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심리전, 각 인물의 의심과 반전, 빠른 전개 속에서도 놓치지 않는 감정선은 관객을 몰입시킨다.
동시에 영화는 시대극의 무게를 잊지 않는다. 일제강점기라는 억압적 배경은 단순한 스릴러 이상의 메시지를 만든다. ‘말할 수 없는 진실’, ‘눈빛으로 전하는 신념’, ‘침묵 속의 저항’은 영화가 가진 고유의 감정 밀도를 높인다.
■ "말 대신 행동으로" 전하는 메시지
<유령>은 말이 많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불필요한 설명 없이 행동과 표정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밝혀지는 진짜 유령의 정체와 그의 선택은, 무엇이 진짜 저항이고 무엇이 위장된 충성인가를 관객에게 던지는 강력한 질문이다.
무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닌, 정보로 싸우고, 침묵 속에서 싸우는 사람들. 영화는 그들을 통해 저항의 새로운 정의를 제시한다.
■ 여성의 저항을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시도
<유령>은 여성 캐릭터들이 중심에 선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박차경과 유리코, 두 여성 캐릭터는 전통적인 독립운동의 이미지(남성, 무력, 투쟁)와 다른 방식으로 싸운다.
이들의 싸움은 섬세하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계산적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단호하고 과감하다. 이 영화는 여성도 전면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마무리: '끝난 역사는 없다'
<유령>은 단순히 과거를 배경으로 한 첩보물이 아니다. 영화는 말한다. “끝난 역사는 없다.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된다.”
진짜 유령은, 우리가 잊은 이들일 수 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저항자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용기. 영화는 그 기억을 다시 불러오며,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당신이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유령>은 그 질문을 남긴 채 조용히 스크린을 떠난다. 그러나 그 울림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