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2018년작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모티프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단순한 원작의 재해석을 넘어서, 이 영화는 한국 사회의 모순과 청춘 세대의 불안을 날카롭고도 깊이 있게 파고든다. 이야기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폭력, 계급, 욕망, 무력감 등 우리가 말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
이야기의 겉과 속
주인공 종수(유아인)는 시골에서 혼자 농장을 지키며 살아가는 청년이다. 그는 우연히 어릴 적 이웃이었던 해미(전종서)를 다시 만나고, 그녀와 가까워진다. 그러나 해미는 여행을 다녀온 후,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을 데려온다. 겉으로는 세련되고 부유한 벤은 해미와 종수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고, 이후 해미는 돌연 종적을 감춘다.
영화는 해미의 실종을 계기로 종수가 벤을 의심하고 뒤쫓는 과정을 그리지만, 뚜렷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모호함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이창동 감독은 의도적으로 결말을 열어두며, 관객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를 믿고 싶은가?”
불안정한 청춘, 안정된 침묵
<버닝>은 ‘청춘의 분노’를 직접적으로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강하게 그 불안을 드러낸다. 종수는 대학을 나왔지만 불안정한 아르바이트에 종사하고, 부모의 문제까지 짊어지고 있다. 해미는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지만, 아무도 그녀의 고통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
반면 벤은 모든 것이 갖춰진 듯 보인다. 좋은 차, 넓은 집, 예술적 취향, 여유 있는 미소. 그러나 그 이면에는 무감각하고 냉소적인 태도가 숨겨져 있다. 그는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기묘한 취미를 고백한다. 그것이 실제 범죄인지 상징인지 애매하게 처리되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존재가 ‘태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계층의 은유라는 점이다.
허공 속 불꽃의 의미
영화 속 '불'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해미는 어릴 적 자신이 본 '추모의 춤'에서 사라지는 오렌지의 마법을 이야기하고, 벤은 불태운다는 행위에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 종수는 결국 그 불을 진짜로 사용한다. 이 모든 ‘불’은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이들이 가진 무력한 분노의 표출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종수는 벤을 향해 불을 붙인다. 그 장면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존재감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한 청년의 최후의 선택이다. “나는 이렇게라도 존재한다”고 외치는 불꽃은 허공에서 이내 사라지지만, 그 잔상은 관객의 마음 속에 오래 남는다.
왜 이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가
오늘날 많은 청춘들이 종수처럼 살아가고 있다. 학력도 있고, 노력도 하지만,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반면, ‘벤’과 같은 이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성공’과 ‘여유’를 누린다. <버닝>은 이 불균형의 구조, 계급의 단절, 청년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절망을 그리면서도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비록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해도, 그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며, 영화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개인적으로 남는 질문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종수의 눈빛이 떠오른다. 말없이 바라보는, 그러나 그 안에 수천 개의 질문이 담긴 눈빛.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지?”, “내 분노는 어디로 가야 하지?”
아마도 이 영화는 답을 주기보다, 같이 고민하자고 말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그리고 나는 내 안의 불안도, 내 곁의 침묵도, 조금은 다르게 보게 되었다.
결론: 불꽃은 사라져도, 그 열기는 남는다
《버닝》은 쉽지 않은 영화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의도된 것이다. 우리가 외면해온 현실, 말하지 않았던 감정, 이름 붙이지 못한 불안을 꺼내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불꽃은 허공에서 사라지지만, 그 열기는 분명히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온도를 느끼며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무얼 태우고 있는가?”